언어: 한국어

워블포크 이야기

덮어 둔 스케치북 속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어요.

넘겨 봐요

스케치북 마을

미색 종이 위로 옅은 모눈이 골목처럼 나 있는 곳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모여 살아요.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워블포크라고 불러요. 잉크로 된 몸이 끝까지 마르지 않아서, 가만히 서 있어도 조금씩 꿈틀거리거든요.

잉크 한 방울

종이 밖 어딘가에서 누군가 새 친구를 바라면, 마을 하늘에서 잉크 한 방울이 똑 떨어져요. 방울은 종이에 스며들며 콩처럼 부풀다가 한참 뒤에 눈을 깜빡여요. 새 이웃은 그렇게 태어나요.

번호를 받는 날

새 이웃에게 제일 먼저 인사하러 오는 건 언제나 워비예요. 워비는 졸린 눈을 비비며 조그만 번호표를 달아 줘요. 3번, 777번, 2026번…. 한번 받은 번호는 종이가 닳아도 바뀌지 않아요.

마커 언덕과 연필꽂이 옷장

마을 끝에는 코랄색, 민트색, 노란색으로 칠한 마커 언덕이 있어요. 워블포크들은 언덕 앞에서 사진 찍는 걸 좋아해요. 연필꽂이 옷장에는 니트며 멜빵이며 개구리 모자가 가득해서, 아침마다 뭘 입을지 한참을 고민하지요.

아주 작은 목소리

워블포크들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그런데 목소리가 워낙 작아서, 누가 말풍선에 대신 적어 줘야 종이 밖까지 들려요.

스케치북을 덮으면

스케치북이 덮이면 마을에도 밤이 찾아와요. 다들 모눈 사이에 몸을 누이고 잠이 들지만, 워비는 밤새 페이지 귀퉁이를 지켜요. 워비 눈이 늘 졸린 건 그 때문이에요.

마을 지킴이, 워비

어서 와요, 모눈 골목은 좁으니 천천히 걸어요.

스케치북 마을의 0번이에요. 맨 처음 떨어진 잉크 방울에서 태어났어요. 콩 모양 몸에 정수리에는 머리카락이 딱 한 가닥 있는데, 바람이 없어도 늘 살랑살랑 흔들려요. 그래서 페이지 저 끝에서 봐도 워비인 줄 금방 알아요.

이웃들

이름은 만나는 사람이 지어요

번호는 워비가 달아 주지만, 이름은 마을 누구도 지어 주지 못해요. 처음 만나서 불러 주는 사람만 지을 수 있대요. 이름 없는 이웃들이 지금도 종이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밤에도 마을 하늘에서 잉크 한 방울이 똑 떨어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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